교단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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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침례교회 역사는 1889년 제물포에 도착한 캐나다 독립선교사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의 선교사업으로부터 시작했다.
    이후 침례교는 일제 탄압기와 해방 후 혼란기를 거치는 와중에도 생명을 이어왔다.
    1950년 한국 침례교는 미국 남침례교단과 선교협정을 체결하고 발전과 번영의 전기를 마련한 이후
    전도와 선교를 지상목표로 신앙정신을 구현하는 교단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침례교회의 시작
    blt01.png침례교회의 시작은 언제부터냐?
    ‘침례교회의 시작은 언제부터냐?’에 대한 질문은 침례교회 교회사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는 문제다.
    신약성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침례 요한이 요단 강에서 회개의 침례(Βάπτισμα)를 베풀던 시기인 신약교회를 침례교회의 출발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중세 가톨릭교회의 내부 개혁세력인 루터(Martin Luther)나 칼빈(Calvin)의 개혁교회 운동에 비견해 외부 개혁세력의 중심이었던 재침례교파(Anabaptists)에서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근거에 의하면, 기독교회사에 침례교회란 이름이 정식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644년 즈음 영국침례교회의 발현에서부터이다.
    물론 유럽대륙 내에서 활동하던 재침례파 중 일원인 네덜란드의 재침례파 성도들이 영국으로 건너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침례교도의 영적인 선조는 신약성서 시대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다. 교회사에서는 감추어져 있는 신약 성서적 표준과 모범을 이어온 일단의 무리와 종교개혁시대 상당한 개혁세력을 구축하며 역사 속에 등장했던 재침례파에서 그 영적 계승을 볼 수 있지만 침례교도란 공식 이름의 발단은 이때부터라고 보는 견해가 정설이다.

    신앙의 모본과 최고 권위로서 신약성서가 재발견되었고, 영국 국교회로부터 나온 신자들은 신약성서의 원리들을 교회의 기반으로서 보존하여, 신약성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혈통을 이으면서 그들의 대열에 가담하게 되었다. 특히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개인적 신앙고백에 의한 믿는 자에게 베푸는 침례를 강조하는 부분과 의식의 방법에서 침수례(浸水禮, immersion)가 두드러지게 강조되므로 당시 박해자들(로마 가톨릭은 물론 영국 국교회, 당시 개혁파인 루터교, 장로교 등)로부터 ‘침례교도’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마치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신약시대 안디옥에서 믿는 자들을 지칭한 것처럼, 그 근원과 시작이 어떠하든지 침례교도란 이름을 갖게 된 신약 성서적 기독교인들은 처음부터 혹심한 박해를 받으며 성장했다. 영국 침례교도들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초기 박해 시기의 “천로역정”(天路歷程)의 저자 존 번연(John Bunyan)을 비롯해, 불후의 명설교가 스펄젼(Charles Haddon Spurgeon) 목사, 최초로 해외선교의 횃불을 든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 등을 들 수 있다.
    blt01.png침례교회의 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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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유럽대륙 어두운 교회 역사 속에서 발아하기 시작한 신약 성서적 모본을 실천하고자 하는 신약교회는 영국에서 잎을 내어 침례교회로 모습을 드러냈고, 당시 종교의 자유를 찾아 건너온 청교도들과 함께 미국에서 정착해 대각성부흥운동 등을 거치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일약 세계적 대 교단으로 성장하였다. 초기 식민지 미국에서도 침례교회는 박해를 받으며 성장했다. 대표적 박해의 사례로, 하버드 대학교 초대 총장인 헨리 둔스터(Henry Dunster)는 유아세례를 거부한다는 이유만으로 총장직에서 면직되고 그 식민지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그러나 양심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정신으로 제퍼슨의 초기 미국 헌법의 기초를 이루는데 지대한 영향을 준 침례교회는 미국의 건국과 더불어 박해에서 벗어나 무한 성장할 수 있었다. 현재 미국 남침례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는 단일 교파로는 개신교 중 세계에서 제일 큰 교파이며, 가장 많은 해외선교사를 파송한 교단이 되었다. 1973년 5월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교회의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던 세계적인 전도자인 빌리 그레엄(Billy Graham) 목사나, 대통령 재직 중 교회학교 교사직을 버릴 수 없다고 하여 유명한 일화를 남겼고 대통령 퇴임 후 더 활발한 활동을 한 지미 카터(James Earl Carter Jr.) 집사 등이 훌륭한 침례교인들이다. 현재 전 세계 침례교도의 통계는 침례교세계연맹(BWA)에 가입한 교회 수 168,491개, 침례교인 47,500,324명, 등록 교인은 1억5천만 명을 넘는다(2017.12월 현재).
    한국의 침례교회
    blt01.png독립선교사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한국의 침례교회는 1889년 12월 8일 캐나다에서 온 독립선교사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의 선교사업으로부터 시작됐다. 신학교육을 받지 않고도 강력한 영적 경험을 토대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그는 후에 고국으로 돌아가 신학교육을 받은 후 원산을 중심으로 복음 전도와 전도자 양성에 힘썼다. 아울러 때를 같이하여 펜윅 선교사와 교분을 갖고 침례교회 신앙을 심어준 고든(Adoniram J. Gordon) 목사가 시무하는 보스턴의 클라랜돈가 침례교회(Clarendon Street Baptist Church)에 속해 있는 엘라 싱 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의 폴링(Edward Clayton Pauling)선교사 부부와 가들라인(Amanda Gardeline)의 선교로 공주와 칠산, 강경에 최초의 침례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1901년 원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펜윅 선교사가 엘라 싱 선교회의 선교지역인 충청도와 전라북도를 인수받아 활동적인 순회 복음전도 활동을 펼쳐 충청도와 전라도 북부, 경상도 북부지역에 31개의 침례교회가 설립되었다. 한국을 위시하여 동북아의 선교에 뜻을 둔 펜윅은 보다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위하여 1906년 10월 6일 강경에 전 사역자를 소집하여 대회를 열고 46개 조로 된 교구를 만들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였다. 매년 소집되는 대회를 ‘대화회’라 하고 첫 대화회(1906년)에서 국내의 효과적인 전도활동을 위해 교단 산하에 원산, 강경, 공주, 영동 등 구역을 설정하고 지도자를 세워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아울러 그 해 한태영 외 4인을 함경도와 간도로 파송, 전도하게 함으로써 선교 지향적 교단의 출발을 보였다. 1921년에는 일제가 '대한'이란 국호를 사용치 못하게 함에 따라, 국경을 넘어 동북아시아 선교의 비전을 담기 위해 '동아기독교회'로 교단 명칭을 바꾸어 만주, 시베리아, 간도 등에 많은 선교사와 순회 전도자를 파송하여 교회를 세움으로써 교세를 확장하였다. 이 시기 교단은 이미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는데 특이할 만한 것은 모두 복음 전도에 힘쓰다 해난 사고로, 공산당에 의해, 또는 일제 밀정(密偵)으로 오인되거나 몽고(蒙古)토족(土族)의 습격으로, 또는 일제 박해에 의해 순교했다.

    특히 1925년에 총회가 일제 강점기 하의 학교 교육을 금지하는 훈령을 내리고, 일제의 궁성요배(宮城遥拝)와 신사참배(神社參拜)에 불응하여 갖은 박해와 고난을 받았다. 1941년 원산 32인 사건은 교단에서 발행한 성경을 불온문서로 취급한 일제에 의해 모든 재산이 압류되고 이종근(당시 총회장)감목을 위시해 32명의 교역자가 옥고를 치르게 된 사건이다. 마침내 1944년 5월 10일 일제는 교단 해체령을 내렸다. 당시 통계로 한반도와 만주, 간도 지역에 26개 구역(현 지방회) 400여개의 침례교회가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교단은 재건에 나서(남한 6개 구역, 42개 교회) 마친 후 미국 남침례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 해외선교부와 선교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대한기독교침례회’로 교단 명칭을 정하고 1951년 침례병원을 설립했으며, 1953년 침례회출판사를 설립해 오늘의 교회진흥원으로 발전시켰고, 1954년 대전에 ‘침례회신학교’(현 한국침례신학대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1955년에는 교단 기관지인 ‘침례회보’(현 침례신문)을 발간하고 일취월장하는 가운데 몇 번의 교단 명칭 변경을 하여 현재 ‘기독교한국침례회’가 되었다. 특히 1970년대에는 '한미 전도대회'를 통해 교회가 양적으로 부흥했으며 새신자 훈련총서를 비롯한 교육과 훈련교재를 통해 성경교육으로 교회의 질적 부흥을 이뤄냈다. 아울러 탁월한 부흥사들의 부흥회를 통해 교단 내외적으로 부흥하는 교단이 되었다.

    또한 1981년에는 수도권 목회자 양성을 목적으로 '수도신학교'가 설립되었고, 1990년 은퇴교역자의 연금 지급과 사고, 질병으로 인하여 사역할 수 없는 목회자와 미망인, 그 자녀들을 돕기 위해 '교역자복지회'가 설립되었다. 한편 침례교회 여성들은 기도, 교육, 선교훈련 프로그램과 증거, 섬김의 프로그램에 연합하도록 1954년 전국여전도연합회(현 전국여성선교연합회)가 구성되었고, 1982년에는 전국남전도연합회(현 전국남선교연합회)가 구성되었다. 침례회 총회 본부도 동자동 시대를 반세기 만에 마감하고 구로구 오류동 115-1에 1,000여 평의 대지, 1,180평의 건물을 매입, 이전하여 오류동 시대를 열었다. 그후 2013년 10월, 미국 남침례회 한국 선교부(Southern Baptist Convention IMB) 빌딩의 대지에 총회 빌딩을 새롭게 건축하여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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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경침례교회, 남한 최초의 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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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기독교회의 권서순회 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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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힌즈 여사와 원산 성서학습반